윌버포~1

월리엄 월버포스는(William Wilberforce,1759-1828)는 영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류 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1780년 약관 21세의 나이로 요크셔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했다.

그는 25세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매우 타락한 당시의 영국 타락한 정치계를 떠나고자 했다. 그리고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했었다.

그러나‘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을 작사한 존 뉴턴 (J. Newton)의 “나는 주님이 국가를 위해 일하도록 당신을 세우셨다고 믿고 있으며, 또 그렇게 되길 기대한다”는 말에 감명을 받고, 월버포스는 많은 기도와 숙고 끝에 정치에 남기로 결정했다.

1788년 그는 일기에 “나의 길은 공적인 길이며, 내가 일할 곳은 이 세상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함께 어울려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섭리에 따라 맡겨졌다고 생각했던 그 직책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라고 썼다.

월버포스는 영국 상류충의 생활을 청산할 마음을 먹었다. 웨슬리 형제들이 주도한 대규모 부흥운동이 아직은 하층 계급의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치고 있을 때였기에 상류층은 많은 부조리와 불공정이 난무하던 시대이다. 당시 영국은 간음과 도박은 사회 지도자들에 공공연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노예 무역을 통하여 많은 이득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월버포스는 그의 남은 생애 거의 대부분을 노예 제도와 노예 무역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일관하였다. 그는 “노예 매매는 너무 엄청나고 무시무시하며 치유할 수 없는 악습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폐지하기 위해 싸우기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결과가 어떠하든 간에 나는 이 시간부터 폐지가 성사될 때까지 결코 쉬지 않겠노라 결심했습니다”라며 이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닫고 실행했다. 그는 많은 조롱과 반대를 겪었다. 기독교적 확신을 의회 정책에 구체적으로 반영시키려는 열망을 갖고 있던 그는 7년 후 노예무역에 대한 법안을 제출했다.

동료의원들은 그를 비웃으며 그에게 동조하지 않았다. 한 동료 의원들은 그를 “잔챙이 새우”라고 빈정거렸으나, 점점 그의 진실이 통하게 되자 그를 “잔챙이 새우가 부풀어 올라 고래로 변했다”고 인정했다고 한다.

노예제도는 오랜 관습으로 세계에 퍼져 있던 것이어서, 미국의 경우 남북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으나, 영국은 월버포스의 오래고 끈질긴,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 그가 죽기 3일 전인 1825년(66세) 상하원 모두 통과되어 노예제도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45년간의 줄기찬 노력을 인정받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월버포스와 그의 친구들이 시작한 운동은 영국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법령과 감옥을 개선시키기 위한 복음주의적 운동과 마찬가지였다. 공적인 생활에서의 그의 입장은 기독교의 세계관이 결코 순전히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한 것이었다.

그는 정치인으로서의 자신의 소명에 충실했다. 그에게 소명은 다른 의미를 가졌으며,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자연스럽고 합당한 반응으로 이해했다. 소명이란 모든 이가 모든 곳에서 그리고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이며, 그 부르심을 성취하는 것이다.

소명은 재능(달란트)의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더 이상 그것을 순전히 영적인 은사로만 보지 않고 현대적인 의미의 천부적인 재능으로 보게 만들었다.

월버포스는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가장 복음적이고, 성경에 충실한 방법으로 오랜 시간을 걸쳐서라도 노예제도의 폐지 등 사회개혁을 이끌어 낸 살아있는 영적인 사람, 영성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