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경 총무(L’Abri Fellowship)

세계관 공부에 대한 미신부터 깨어야 합니다. 다음은 라브리 협동간사 김종철씨의 [나의 세계관 뒤집기](성인경) 서평입니다. 김종철씨의 서평을 읽어보면 요즘 대학생 청년들이 세계관에 대해 느끼는 거부감과 공포심이 어떤 것인가 잘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세계관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의 ‘미신’이라고 생각하고 그 미신을 깨기 전에는 세계관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1)세계관은 어렵다. 먼저 우리나라에 소개된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책들은 대부분 번역된 것인데다, 쓰이는 용어 또한 익숙하지 않은 것이어서 난해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어떻게 하면 글의 수준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쓸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이다.

특히 이 글은 자서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의 문화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쓴여진 것이어서 당신이 기독교 세계관을 쉽고 바르게 이해하는데는 더 없이 좋은 책이 될 것이다. 나는 프란시스 쉐퍼가 쓴 글을 읽다가 막히는 부분이 나오면 언제나 라브리 간사들이 쓴 책을 찾아 읽었는데, 이러한 방법은 나에게 더 깊은 이해를 주곤 하였다. 당신에게도 이 방법을 주저 없이 권한다.

2)세계관 논의는 이제 유행에 뒤 떨어진 것이다. 80년대 부흥했던 세계관에 관한 활발한 논의가 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시들해져 이제는 한물간 이야기로 여겨지는 듯하다. 물론 80년대 ‘맑시즘’을 가지고 과학적으로 우리 사회와 문화를 분석하는 흐름에 대한 대안으로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에 매달렸지만, 이제는 그 대항 세력이 힘을 잃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계속되는 ‘영적전쟁’이 있고 세계관이 ‘세계를 보는 인식의 틀(worldview)’ 내지는 ‘삶의 체계(life system)’일진대 ‘세상’와 ‘삶’이 존재하는 한 결코 한물간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저자는 ‘사상은 결과를 낳고’ 세계관은 ‘집의 기둥’과 같기에 우리가 가진 세계관이 성경적인지 살펴서 바꾸지 않는 한 개인이건 그가 속한 문화건 간에 근본적인 변화는 요원하며 우리도 유럽 교회의 전철을 밝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3)세계관 공부는 실제적인 삶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한다. 90년대 들어와 나타나는 세계관 논의에 대한 회의는 앞에서 지적한 사회적인 변화 뿐 아니라, 세계관 공부가 머리만 차갑게하고 삶의 열매가 없었다는 인식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이 책은 올바른 세계관이 낳은 열매의 예로 가득차 있다. 저자는 개인의 삶 뿐아니라 교회에서,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어떻게 기독교 세계관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결과들을 가져다 주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당신은 이 책을 통해 세계관 공부란 단지 지적인 핑퐁게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성, 휴가를 즐기는 법, 큐티, 부부생활 등과 같은 일상을 어우르는 포괄적인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당신이 라브리를 단지 기독교 세계관만 공부하는 지적(知的)인 단체로만 알고 있다면 저자의 말을 들어 보라. “라브리에서는 사람들을 성경공부 뿐아니라 일상적인 가정생활 속에서의 대화, 노동 등을 통해 전인격적으로 돕고 있으며… 라브리의 재정은 후원을 요청하거나 부탁하지 않고 죠지뮬러 식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해결한다.”

세계관(世界觀)이란?

오늘날에는 어떤 것에 대해 가치 판단을 해야 할 때 “세계관이 잘 서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에도 그 사람의 “인격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세계관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청년은 “신앙이 좋다.”고 말하던 것을 이제는 그 사람은 “세계관이 괜찮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세계관이란 말이 이처럼 보편적으로 사용되다 보니까 가끔은 굉장히 똑똑하고 많이 배운 사람의 특허품으로 오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계관은 말 그대로 ‘세계를 보는 눈’ 혹은 ‘세상을 보는 관점’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관이란 다음과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세계관은 선입관이나 전제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상당한 수준의 판단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마다 무의식 중에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선입관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나쁘다”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이 말을 여러분도 믿습니까? 그런데 이런 가치관을 가지게 된 것은 강의를 들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무의식 속에 형성되었기 때문입니까?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못 배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런 선입관이 다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수의 지적인 사람들만이 의식적으로 세계관을 선택합니다. 사람들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이건 간에 일상생활 속에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프란시스 쉐퍼(F.Schaeffer)는 이걸 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전제(前提, Presupposition)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홍역에 걸리듯이 주위의 가족과 사회로부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지게 된다. 그러나 보다 지적인 사람들은 그들의 전제가 어떤 세계관인가를 주의 깊게 생각한 후에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고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그는 사람마다 갖고 있는 전제와 세계관을 동일시합니다.

둘째, 세계관은 보이지 않는 저울과 같은 것입니다.

저울은 물건의 무게를 확실히 알고자 할 때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세계관이란 자신과 자신의 바깥 세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달아보는 보이지 않는 저울과 같은 일련의 지적인 사고 체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관이란 한 개인이 세계에 대해 갖는 종합적인 ‘신념 체계( a belief system)’, 혹은 ‘사고 체계(a thought system)’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제시한다는 측면에서는 세계관이란 곧 철학이기도 합니다. 인생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답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철학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야스퍼스(K.Jaspers)도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철학에서 도피할 방법은 없다… 어떤 사람은 철학을 부인하면서도 스스로는 무의식적으로 철학을 실천하고 있다.”

셋째,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적인 ‘지성(知性)’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말이나 기독교적 전제, 신념 체계, 사고 체계 혹은 기독교 철학이라는 말이 문자적으로 쓰여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세계관을 의미하는 언급은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라”(빌립보서 2:5, 고린도전서 2:16), “네 마음의 변화를 받아”(로마서 12:2), “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신명기 6:5), “네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누가복음 10:27)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의 “마음”, “뜻”이란 말은 모두 ‘지성(知性, mind)’을 의미합니다.

어떤 바보같은 대학생이 “‘지성’이 무어꼬?”라고 말하니까 그의 친구가 하는 말인즉, “지성이란 건성 피부가 아닌 걸 말하는 거 아이가?”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만, 지성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사물을 판단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지성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변화와 교육을 통해 소유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시도할 때 점차로 발전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성경과 성령의 도움은 필수적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음, 혹은 성경적 지성이 기독교적 세계관입니다. 그리고 이 기독교적 지성은 예수님의 지성을 따르려는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지적 혼돈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요청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필요성

왜 기독교적 세계관이 필요할까요? 그 기본적인 대답은 이미 앞에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기독교적 세계관을 확립할 필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기독교 세계관 확립이 시급히 요청된다고 봅니다.

첫째, 감정에 의존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약 200년 전인 1799년에 쓴 베르누신부의 ‘선교보고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정말이지 단순하다. 그들은 어떤 것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우리가 설교를 했을 때 조심스럽게 듣지도 않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들은 가르쳐 주는 것을 쉽게 믿었고 그것 때문에 당하는 어떤 희생도 감수했다. 그러나 내가 다시 성경을 조심스럽게 가르치다 보면 그들이 바로 깨닫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는 이 대목을 읽다가 울분이 솟았는데, 여기의 “어떤 희생”이란 온갖 박해에 맞선 순교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국인은 이유 없이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무엇이 다릅니까? “아무 것도 묻지 말고 덮어놓고 믿어라.” 이런 말을 들고 라브리(L’Abri)를 찾아온 한 불교도의 첫마디가 “기독교는 비합리적인 종교라고 생각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런 오해가 생겼을까요? 기독교인들이 우리의 민족 정서상 감정 의존적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편승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확실히 우리 민족은 감정과 직관을 중시합니다. 일부 정치인들과 경영인들이 즐겨 쓰는 “감(感)의 정치”, 혹은 “감의 경영”도 같은 맥락입니다.

둘째, 현대인은 이성으로부터 도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은 이성에서의 도피를 선도했습니다. 오늘날의 지적 흐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성에서 도피하여 체험과 감정, 느낌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으로 ‘이성이 해체’되고 ‘광기’ 혹은 ‘원시적 신비주의’가 합리성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신세대들은 동양 사상보다도 서구식 교육과 그 사상에 더 익숙하기 때문에 이러한 감각적인 시대적 흐름에 민감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 와중에 큐핏(Don Cuppit)과 같은 문화 신학자처럼 “나는 기독교 교리나 신앙 체계가 없이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호언하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기독 신앙은 이성과는 무관한 인간의 감정의 산물이며, 이성의 작용이 동반될 필요가 없는 비지성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불건전한 성령 운동이나 영성 운동은 실존주의 신학 못지 않게 감정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지성이 발붙일 틈이 없을 정도로 교회 안팎에서 반지성적인 흐름이 도도합니다.

셋째, 신앙은 비지성적이라는 잘못된 영성 때문입니다.

아직도 “신앙은 이성과 충돌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성은 “신앙의 방해물이나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기야 루터(M.Luther)도 한 때는 이성을 “마귀의 매춘부”라고 부른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세계관’이란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비영적인 ‘지적 놀음’으로 매도당하기 싶습니다. 그리고 기성 세대들은 ‘세계관’이란 말을 교회가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거부 반응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영성(靈性)’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있습니다.

잘못된 영성은 성경 해석에 많은 오해를 낳고 있습니다.
1)바울이 철학을 조심하라고 한 것을 두고 모든 철학과 이성적 학문이 다 무가치하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골로새서 2:8)

2)바울이 아테네에서 전도할 때 십자가만을 전하지 않고 인간의 지혜에 의지하여 철학적인 접근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사도행전 17:16-34) 3)기독교는 전도라는 미련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을 두고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종교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18-21) 이와 같은 잘못된 성경 해석은 모두 잘못된 영성에 기인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을 무시한 결과들

세계관은 반드시 결과를 초래합니다. 즉 우리의 결단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결정을 짓게 합니다. 세계관의 역동성이 낳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여기서는 세계관을 무시할 때 파생되는 몇 가지 결과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혼합주의적인 사상을 낳습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표출하는 개인적인 견해나 행동의 뿌리는 세계관입니다. 그가 어떤 세계관을 가졌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철학자 안병욱 교수는 그의 인생론에서 “나는 신앙하는 것과 학문하는 것을 별개의 문제로 생각한다.”고 피력했는데, 그의 이런 견해는 많은 청년들로 하여금 신앙과 학문의 비일관성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최근까지만 해도 많은 기독 청년들이 신앙과 학문, 신앙과 직업, 신앙과 생활의 분열을 전혀 문제시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세계관의 부재가 낳은 혼합주의의 결과였습니다.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교회에는 “수다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고린도후서2:17) 했습니다. 여기의 ‘혼잡하게 한다’는 말은 ‘섞는다’ 혹은 ‘혼합한다’는 말입니다. 즉 당시의 헬라 철학에 물든 이교도적인 궤변가(sophist)들이 세속적인 철학과 성경 사상을 섞은 혼합주의(syncreticism)를 파생시킨 것입니다. 그 결과 일상생활 속에서 결혼 문제, 성적인 문제, 경제 문제 등에서 타협적인 태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러한 고린도교회의 혼합주의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은 사랑이 동반된 지적 전쟁 밖에 없다고 권면했습니다.(고린도후서10:5)

둘째,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 전락시킨다.

여러 세계관들 사이의 갈등은 알고 보면 상이한 진리와 종교 사이의 갈등입니다. 오늘날의 세계적 혼돈의 핵심은 바로 이 둘 사이의 싸움을 말합니다.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세계관적 위기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기독교를 진리가 아니라 종교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주와 인간에 대한 유일한 진리(眞理)’가 기독교라고 말합니다.(이사야 45:18,19; 사도행전 26:25)

제가 여기서 진리라고 말할 때 그것은 마치 ‘장갑’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장갑이 두 켤레가 있습니다. 하나는 부티가 나는 비싼 가죽장갑이고 다른 하나는 빈티와 촌티가 주루루 흐르는 털장갑입니다. 그런데 가죽장갑은 추운 겨울에 끼고 나가면 손이 시립니다. 그 이유는 내 손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털장갑은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손이 시리지 않습니다. 손에 꼭 맞고 따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겨울이 되면 어느 것을 낄까요? 그러면 기독교는 가죽 장갑과 같을까요 아니면 털장갑과 같을까요? 물론 털장갑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주와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해 바른 대답과 설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로서의 기독교가 무너진 곳에서는 온갖 우상과 미신이 판을 치게 되고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이제 이것은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만의 의견이 아닙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의 다수도 그와 같은 의견을 따르고 있습니다. 미국의 조지 바너가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국민 67%가 그렇게 믿고 있고, 복음주의 기독교인의 50% 이상이 그렇게 믿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까지도 현대 문화의 상대주의적인 세계관에 포로가 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시인 구상씨는 “한국 기독교인들은 생명보험 들듯이 예수 믿고 있다.”고 꼬집었는데, 그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가 종교로 전락되면 온갖 종교적인 기교(技巧)와 기복(祈福) 사상이 기승(氣勝)을 부리게 됩니다. 그리고 정직한 질문과 대답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 결과는 서양의 히피들처럼 질문을 멈추고 마치 마약에 취한 듯이 ‘예수에게 미쳐라(Get high on Jesus)’고 소리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가 신비적인 체험만을 중시하는 종교가 되어 버린 탓입니다.

셋째, 사회적 기틀을 연약하게 합니다.

개인이나 국가는 철학이 있어야 견고합니다. 일찍이 로마 제국은 세계 정복이라는 ‘개똥철학’이라도 있을 때는 국가가 지탱되었지만 그것마져 사라졌을 때는 내부적인 분열과 혼돈에 의해 종말을 고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역사와 문화는 철학의 산물입니다. 철학, 즉 절대적인 세계관이 없는 개인이나 국가는 새로운 역사와 문화를 창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지탱하기도 불가능해 집니다. “절대적인 세계관이 무너진 결과는”, 쉐퍼(F.Schaeffer)는 크게 네 가지를 지적하여, “도덕적 기초의 붕괴, 법률을 위한 명확한 기초 상실, 악의 문제에 대한 대답 부재, 지성적 전도 방법의 폐기”라고 했습니다. 절대적인 세계관이 무너지면 전반적으로 사회적인 혼란이 온다는 말입니다. 가치 기준이 모호한 결과입니다.

역사가이며 언론가인 존슨(P.Johnson)이 말하는 지난 200년간의 기독교적 세계관의 공백이 가져온 사회적 현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지식인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성직자를 대신했으나 비정한 관념의 포학(暴虐)으로 최악의 압제를 행사했다(마르크스,사르트르, 러셀), 2)종교적인 우상을 타파하고 합리적인 이성을 세우려 했으나 그 이면에는 인격적 양면성을 드러내었다(셀리, 톨스토이, 촘스키), 3)타인으로부터 불후의 명성을 얻고 흠모의 대상이 된 사상가들이 개인적인 도덕적 삶은 추악하기 이를 때 없었다(루소, 브레히트, 훼밍웨이) 그들이 가져다 준 유익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로 인해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동반되기도 했습니다.